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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것은날개가있다 강수연

by MOVIE75 202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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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일기

청담동카페에서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기다리던 강수연과 인터뷰
Q.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도연이가 귀국하며 전화 줬다. 내 생각이 제일먼저 났다며 넌 나보다 더 잘 될거지만 힘들거나 외로울 때전화하라했다.
 
Q. 상이 주는 무게감?
강수연:책임감도 있고 행동에 제약도 받고 욕심내면 건방지다 하고 마음비우면천박하다 하고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Q. 시집은?
강수연:나이들면장애인취급이에요 전 멀쩡한데 정열도 많다
자기중심이분명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좋아요 인연 닿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겠죠.
이상한에너지나 영감이나 기를 준분은 전무송선배는 아제아제바라아제에서 아버지역이었는데 그분의 기가 제몸으로 들어오며온몸이 짜르르해지고 타오르는불이몸을 화끈거리게했고 경마장가는길에 문성근선배도 비슷했다.
임권택감독은 제연기에 중심을잡아주고 성숙하게길잡이가되어준스승님이예요.
한번도제연기가만족한적없어요
절제하는마음이중요하다.

Q. 재미있게 사는 법?
지금하는일이 재미있어야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감사하며산다.


이문열의 소설 중 가장 대중 소설적인 작품으로 당시 베스트셀러였지만, 작가 본인은 이 소설의 문학적 성취를 매우 불만족스럽게 여겨 이러한 성공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긴다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었다. 일설에 의하면 한 달도 안 돼서 졸속으로 썼다고. 사실 평론가들도 "통속 소설"이라고 평했다.
군데군데 마초적인 시각이 많다. 그리고 주인공은 살인 후의 심경이 복잡해서 그런지, 독백이나 현학적인 수식어들이 난무한다. 사실 고급진 어휘는 이문열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문열 특유의 심리묘사를 통해 연인 간의 감정선 변화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특히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애증의 감정을 묘사하는 부분 이 압권이다. 또한 사랑과 현실의 삶 사이를 저울질하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한 남자의 내적갈등을 묘사하는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연발하게 한다.

1990년 장길수 연출, 손창민, 강수연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원작에 대한 평이 어쨌든 대종상 영화제 상도 휩쓸고 흥행 성공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임형빈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한국 남성에 비해서 변해버린 세대의 상징인 서윤주의 대비를 통해 변화되는 사회상을 이야기하려는 노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순결과 가족에 대한 이문열의 보수적인 가치관이 묻어나는 영화다. 남자 주인공은 본인은 창녀촌에서 동정을 떼놓고 정작 여주인공이 자기는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자 큰 충격을 받는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꽤 퍼져있던 부유한 중년과 여대생간의 스폰서 문화가 임형빈서윤주 관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이문열의 소설 중에서는 가장 대중소설적인데, 현대의 미성년자들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세대의 차이도 있거니와 소설내용도 보수적인 만큼 당연하겠지만. 제목이 많이 패러디된다.

오스트리아의 한국 대사관에 소속되어 있는 '나'는 군츠 경위로부터 어느 한국인 여성이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를 쏜 용의자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는데,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증언을 거부하겠다고하는 바람에 군쯔 경위는 어쩔 수 없이 '나'를 호출한 것이었다. 한국인인 '나'가 오자 '그'는 닫았던 입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의 이름은 '임형빈'이며, 총에 맞은 여자는 '서윤주'였다. 심문을 받던 중 임형빈은 '나'가 자신의 대학 선배인 걸 알게 되자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사건 경위를 모두 털어놓게 된다. 처음에는 임형빈이 자백하는 식으로, 나중에는 임형빈 시점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명문대에 합격한 뒤, 청운의 꿈을 품고 고시에 매진하던 임형빈은 우연한 계기로 윤주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윤주에게 흠뻑 빠진 형빈은 갖은 노력 끝에 윤주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입신양명의 꿈은 뒤로 한 채 윤주와의 연애에 취해버린 형빈은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을 거덜낼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형빈과 윤주는 여러가지 이유로 끝내 결별하게 된다. 결별 후 윤주는 모두와 연락을 끊은 채 종적을 감추게 되는데, 그런 윤주가 걱정된 형빈은 그녀를 찾아 나선다.

이태원동의 한 술집에서 재회하게 된 형빈과 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끝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재확인하게 되고 끝내 검열삭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날로 형빈과 윤주는 소꿉놀이와도 같이 어설픈 살림집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낌새를 눈치챈 아버지에게 윤주와의 관계를 들켜버리게 되고, 윤주와 형빈의 아버지가 대면한 끝에 윤주는 말없이 형빈을 떠나게 된다. 형빈은 윤주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끝내 재회하지 못한다. 한편 형빈을 떠난 윤주는 이태원을 전전하다가 알게된 흑인 미군과 결혼한 뒤 예전부터 꿈꾸던 미국행을 하게된다. 윤주와의 이별 뒤 폐인같은 삶을 이어가던 형빈은 때마침 날아온 영장을 받고 결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도망치듯 군입대를 하게 된다.

전역한 뒤 서른이 되기 전 결혼해야 한다는 주위 등쌀에 밀려 형빈은 흔히 말하는 참한 여성과 중매결혼을 하게 된다. 서윤주와의 연애를 통해 자유분방한 신여성에 대한 혐오감까지 갖고 있던 형빈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 여성관에 부합하는 검소하고 헌신적인 부인에게 답답함을 느꼈고, 부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한 채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다 소속된 회사의 미국 진출 선발요원으로 발탁된 임형빈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형빈은 가족 동반이 가능함에도 부인을 데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공허함을 현지의 여자들과 불륜관계를 맺으며 채우게 된다. 현지의 늙은 유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던 중 문득 서윤주를 떠올리게 된 윤형빈은 그날로 한인타운에 신문광고까지 내가며 서윤주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된다. 이러던 와중 임형빈이 가족동반이 가능함에도 자신을 데려가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형빈에게 이혼통보를 하게 된다. 형빈은 이혼 통보를 받은 날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산타모니아의 바닷가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극적으로 서윤주와 재회하게 된다. 형빈과 윤주는 서로의 지난날을 추억하며 밤을 지새웠고, 형빈은 다시 한번 서윤주에게 빠지게 된다. 그 후 결심이 선 형빈은 끝내 부인과 이혼절차를 밟고 윤주와 새살림을 차리게 된다.

'인생은 누림과 즐김'이라 말하는 윤주의 은근한 부추김에 넘어간 형빈은 끝내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방탕한 생활을 지속한 끝에 형빈과 윤주는 형빈이 모아둔 돈과 윤주가 사별한 전남편에게 상속받은 재산 모두를 탕진하게 된다. 형빈은 결국 거래처 직원들과 모의해서 거래 차익을 가로채는 식으로 회사돈을 횡령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 얼마 못가 꼬리를 잡히는 바람에 형빈은 울산지사의 한직으로 징계성 인사조치를 받게 된다. 하지만 형빈은 윤주가 한국에 대한 적의감 때문에 한국행을 거부했기에 한국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 후 형빈은 주차장에서 일하는 일개 노동자로 신분이 추락하게 된다.

동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변변찮은 생활을 이어가던 와중,윤주는 백인인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게 된다. 그리고 윤주는 어느 날 갑자기 쪽지 한장 남긴 채 불륜남과 프랑스로 떠나버린다. 형빈은 추적 끝에 둘의 행방을 찾아내지만, 그곳엔 백인 불륜남만 남아있을 뿐, 윤주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곳엔 그저 예전에 같이 여행했던 오스트리아 그라츠로 떠난다는 쪽지 한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형빈은 윤주를 찾아 그라츠로 떠나게되고, 어렵지 않게 윤주와 재회하게 된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반갑게 자신을 맞아들이는 윤주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윤주의 당당함에 압도되어 제대로 추궁조차 하지 못한 채 형빈은 그대로 윤주와 함께 그라츠에 눌러앉게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윤주의 변하지 않는 태도에 실망한 형빈은 결국 윤주와 크게 다투게 된다. 그 다툼에서 윤주는 형빈을 땅개라고 칭하며 동양인에 대한 혐오감을 여과 없이 표출함과 동시에 서양인의 육체적 우월함을 찬양하며 형빈을 볼품없는 사람이라고 힐난한다. 게다가 형빈과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닌 그저 편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참지 못한 형빈은 윤주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긴다. 총에 맞은 윤주는 형빈에게 '왜 일찌감치 자신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냐', '함께 추락하는 것이 두렵다'는 등의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둔다.

임형빈
명문대를 나왔지만 속내는 평범한 시골 청년.
임형빈은 평범하고 순박한 남자로 나오지만 작중에 서술되는 성격 면면을 보면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매우 남성우월주의적인 인물로, 양공주를 비하하는 대목도 있다. 그런데 자신은 정작 서윤주의 사치스러운 면을 눈감아주고라도 얽매려 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서윤주의 편지를 추적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서윤주를 찾을 정도로 극성스러운 얀데레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쾌락만을 쫓는 서윤주를 따르기만 하다가 결국은 파국에 이른다.
서윤주
좋게 말하자면 자유로운 것이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장관리 하는 된장녀. 그리고 다르게 말해 역하렘. 주위에 구애받기 싫어하는 쿨한 성격의 미인.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한 데다 남성 의존이 강하다. 남자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 '한국에 있으면 얽매여야 할 게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한국을 싫어하고, 자유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을 열렬히 동경한다. (말이 좋아 아메리칸드림이지 작 중의 묘사를 보면 그냥 미국병.) 게다가 능력도 없는데 엄청나게 사치스러워서,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했던 임형빈조차 서윤주의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
임형빈과는 같은 대학 동문이다. 처음에는 임형빈의 행동에 경계하며 의구심을 품다가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임형빈을 보게 된다.

서윤주를 찾아 오스트리아까지 쫓아간 임형빈은 서윤주의 독설에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서윤주는 임형빈을 구속하던 자신이 사라졌음을 홀가분하게 여기며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여담으로, 서양 남자의 큰 자지와 정력에 대한 서윤주의 '예찬'이 정말 캐릭터의 본심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작 중에서 욕망과 충동의 화신으로 표현되는 서윤주가 오로지 임형빈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맞지 않는 속궁합을 견뎠다는 것은 솔직하고 직설적인 서윤주의 성향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서윤주가 임형빈에게 성적으로 불만족했다는 대사나 암시를 그 대목 말고는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작 중에서 이러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단 한 번으로, 최후반부 서윤주와 임형빈이 말싸움을 하다가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임형빈의 손에 들린 총 때문에 임형빈보다도 더 흥분해 있었다. 즉, 해당 발언이 진짜 서윤주의 본심이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남성 우월주의적 성향이 강한 임형빈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어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만들 만한 폭언으로써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강수연


네 살 때부터 아역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스타'.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타고난 연기 재능, 여기에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근성까지. 강수연은 배우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완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갓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씨받이》)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희생된 아낙부터 독립적인 현대 여성까지 강수연은 한국 여성상의 극단적 스펙트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CGV 피카디리 1958 - 2010년대 명예의 전당 배우 선정

대한민국의 前 배우.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등에서 여우주연상 총 10관왕을 달성했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정난정 역으로도 유명하다.

1966년 8월 18일에 태어나 3세 때인 1969년에 한 영화 관계자의 눈에 띄어 영화에 처음 출연했고, 1976년 TBC 아역 탤런트 1기로 뽑혀 연기에 본격 입문했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 이후로는 KBS로 활동 무대를 옮겨 1981년 KBS1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이상용과 사회를 본 바 있고, 1983년엔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가 큰 인기를 얻으며 당시 손창민과 더불어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85년 영화 '고래사냥 2'로 성인 배우로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강수연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87년에 개봉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대흥행,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관객 수 124,259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대종상에서 여자 인기상과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기세를 이어받아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 '씨받이'가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해외에서 뜻밖의 주목을 받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 이때부터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1989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개봉했다. 강수연의 삭발투혼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영화제 심사위원장은 폴란드의 세계적 거장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었다.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국내외에서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며 화려한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개봉한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등이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영화계의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4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 '장미의 나날'이 평단에서 혹평을 받고 상업적으로도 첫 실패를 하게 되었다. 더불어 조금씩 치고 올라오는 후배 여배우들과 브라운관에서 활동하던 여배우들이 대거 영화판으로 이동,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이후 '그 여자 그 남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어느 정도 흥행하기도 했으나, 이후 지나치게 호불호가 갈리는 내용들의 영화로 대중들의 혹평을 받았다.

1999년, 영화 '송어'가 개봉되었다. 흥행은 좋지 못했으나 작품성은 호평을 받아 도쿄 국제 영화제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다가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에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출연해 오랜만에 브라운관 복귀를 알렸다. '여인천하'는 최고 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본인의 연기 경력 최초로 전인화와 함께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는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으며, 특히 영화 관련 행사에 자주 등장했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행정 경험이 전무한 것에 비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다"라고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직원들이 "소통의 단절 및 독단적 행보가 지나치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17년을 마지막으로 자진 사퇴했다.

2013년 단편 영화 '주리' 이후로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2021년에는 연상호의 영화 '정이'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알리며 장편 상업 영화로는 약 10년 만에 복귀하였다. 2022년 1월 촬영을 마치고 연내에 개봉할 예정이었다.
2022년 들어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5월 5일 오전부터 두통을 느낀 강수연은 본인이 119에 신고해 구급대원들이 출동하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병원 후송을 원치 않아 철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후 5시 48분에 강수연의 가족들이 넣은 신고를 받고 119가 다시 출동하였으나 그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심정지를 일으킨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면서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어 뇌출혈 진단을 받았고 혼수상태에서 병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5월 6일에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라고 알려졌는데, 수술을 통한 치료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도 경과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가족들도 수술을 포기한 것이 이유로 전해졌다.

일련의 소식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 김동호, 임권택, 류승완, 설경구 등 영화계 인사들이 그의 쾌차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줄지어 발표하며 희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일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7일 오후 3시, 결국 의식불명 상태에서 치료를 받던 중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뇌출혈로 알려졌다.

부고가 전해지자 영화계는 김동호를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영화감독 이우석, 임권택, 정지영, 배우 김지미, 박정자, 박중훈, 손숙, 안성기 등이 고문을 맡았다.

한국 연예계에서 최초로 억대 개런티를 받은 여성 연예인이다. 1992년, 영화 '그대 안의 블루'를 통해 개런티 2억을 받았다고 한다. 1992년 시점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수준. 광고 출연료는 편당 4억에 달했다.
2005년, 영화 '한반도'에서는 카메오 출연만으로 억대 개런티를 받았다고 한다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를 통해 배우 최초로 회당 출연료 500만 원 시대를 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고가의 개런티를 요구하는 탑 배우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불과 3살 때인 1969년에 MBC 공채 1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나이차가 훨씬 나는 조경환, 임현식, 김애경, 박은수와 데뷔 동기다.
현재는 '여인천하'의 정난정 이미지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졌으나, 전성기부터 영화에 전념해 영화 관련 활동에 집중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적인 국제 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당시 언론과 국민들에게 영화계의 상징적인 배우로 각인되게 되었다.
'아역 배우 출신은 성인이 된 후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최초로 깬 주인공이다. 강수연은 뒤에도 나오듯이 초등학교 입학 훨씬 이전부터 계속 인지도 높은 드라마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굉장히 인지도가 높은 아역 배우 출신이다. 이미 대중들에게 일정한 이미지가 각인이 되었음에도, 성공적으로 성인 배우 이미지 전환에 성공한 케이스다.
상당한 동안이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에도 미인으로 평가받았으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해 왔기 때문에 성형 논란도 없다. 이목구비가 새침하고 오밀조밀해서 귀엽고 독특한 느낌을 준다.
광고와 행사 등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으며, 사적으로도 스캔들 같은 잡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이성민이 강수연을 우상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고, 강수연이 세상을 떠나면서 끝내 만나지 못했다.
경수진이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된 사람이 강수연이라고 한다.
최진실이 동명여중을 다니던 시절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다. 참고로 최진실 역시 선배인 강수연을 동경하여 배우의 꿈을 키웠으며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강수연의 드라마를 전부 챙겨 보며 어릴 때부터 강수연을 좋아했다고 한다. 최진실 데뷔 후 서로 친해져 전화 통화를 자주 했다고 한다.
김하늘이 '이홍렬쇼'에서 연예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강수연을 꼽았다. '동감' 시사회 때 참석한 강수연의 실물을 보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감탄했다고 한다.
전성기에 무명 단역 배우나 스태프들을 잘 챙겨주기로 유명했다. 촬영하던 영화가 끝나면 항상 본인의 돈으로 뒤풀이를 하면서 저임금으로 고생하는 스태프들과 무명의 단역들에게 한턱을 내곤 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였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맡을 때에도 했다고 한다. 류승완은 무명 시절 이 말이 너무 멋있게 들려서 자신의 영화 베테랑에서 주인공 서도철의 대사로 인용하게 되었다.
남한테 술 사주기를 좋아하는 만큼 자신도 술을 잘 마셨다. 사실 잘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당대 대적할 자가 없는 전설적인 주당이었다. 영화계에 즐비한 애주가들 중 아무도 강수연을 술로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무서운 점은 술을 마셔도 취한 티가 안 난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강수연이 취기가 돌면 탁자 밑에서 신발을 벗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냐"는 질문에 "못 했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본인도 하고는 싶은데 좀처럼 기회도 연도 닿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미혼인 채로 사망하는 바람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여인천하'로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이후 사극 촬영이 전무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수연이 '여인천하'에 출연할 당시에 작품이 추가 연장되면서 정난정 캐릭터가 본인이 생각하던 점에서 많이 멀어지면서 배역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드라마에서 혼자 빠질 수 없어서 계속 찍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사극 연기에 지쳐서 다른 사극 섭외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여인천하' 이후 사극 연기는 '한반도'에서 명성황후로 짧게 등장한 것이 전부다.
2021년 3월 15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진행한 'KOREAN ACTORS 200' 캠페인에 참여했다
2022년 4월 17일,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한 심권호와의 전화통화로 음성 출연했다
아역 때는 손창민과 많은 작품과 광고를 함께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선 고래사냥 2,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후 같이 작품을 하지 않았다.
1989년 월간지 <샘이 깊은 물> 7월 호 기사에 따르면, 독립적인 성품이라 당시 매니저 없이 혼자 스케줄을 잡고 여러 가지 일을 직접 처리해 왔다고 한 다당시로서도 매우 독특하게 비쳤다고 한다. 성공한 배우임에도 집에 가정부조차 두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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