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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청년전태일 홍경인 문성근

by MOVIE75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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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법대 졸업생 김영수(문성근)는 수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화시장 청계 피복노조의 한 노동자였던 전태일(홍경인)의 분신자살사건 이후 그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전태일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의 일기장을 받아오고, 그를 알던 사람들의 증언을 취재하며 그 노동자의 불꽃 같았던 짧은 삶과 죽음울 되살려 내려고 애쓴다.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유일한 일이다. 그러나 한 노동자의 투쟁이 역사와 가까워질수록 죽음이라는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김영수의 개인적인 삶도 자기희생의 통과제의를 거쳐야만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평점
8.6 (1995.11.18 개봉)
감독
박광수
출연
문성근, 홍경인, 임일찬, 이주실, 동방우, 안소영, 박용수, 독고영재, 김선재, 김은영, 최현숙, 김석주, 오미란, 이재구, 문홍식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각본: 이창동, 김정환, 이효인, 박광수, 허진호

감독: 박광수

촬영: 유영길

출연: 문성근(김영수 역), 홍경인(전태일 역), 김선재(정순 역)


대한민국에서 1995년에 개봉한 드라마ㆍ역사 영화로,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다룬 작품이다. 박광수가 연출하였고, 홍경인, 문성근 등이 출연하였다.



김영수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숨어있는 처지. 때는 긴급조치 등 공포정치의 절정기였던 1975년, 김영수는 조그만 골방에 쳐 박혀서 자신의 뇌리와 가슴속으로 순간순간 뛰어드는 젊은 남자의 실체를 잡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전태일. 4년 전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를 외치며 스스로를 태워버린 평화시장의 한 노동자. 사망 당시의 나이 겨우 22살. 그의 죽음은 김영수를 비롯한 학생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회각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아직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처음에 김영수에게 전태일은 다만 희미한 윤곽에 존재할 뿐이다. 첫 번째 이미지는 통금 사이렌에 쫓겨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점심을 굻은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곤 야간작업이 끝난 늦은 시간에 늘 통행금지를 쫓기며 집까지 뛰어야 했던 전태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지만 늘 공부를 목말라했고 아버지로부터 근로기준법이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법을 아는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순박한 노동자. 그의 삶을 파고들수록 김영수는 전태일에게 집착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전태일에게 오버랩시키게 되며,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비상구가 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삶이 역사와 가까워질수록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김영수의 개인적인 삶도 자기희생의 통과제의를 거쳐야만 한다. 김영수에겐 '사랑의 실천'과 '실천의 사랑'을 저울질하는 정순이라는 애인이 있고,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 현재 영수를 먹여 살리는 입장이기도 하다. 야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정순은 영수를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임신한 몸으로도 현실의 난관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김영수에게 다가오던 공권력은 그가 도피해 버림으로써 정순에게로 향하게 되고 자신의 고통을 대신 치르는 그녀 때문에 영수는 갈등이 깊어진다. 극장 보일러실에 숨어 있게 된 영수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 결단의 순간으로 가고 있는 전태일의 정신적 고뇌와 치열하게 맞서며 자기 자신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시대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월남이 패망한 것과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다. 김영수의 행동반경도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보일러실로 정순이 찾아오고 경찰의 미행을 눈치챈 그는 원고보따리를 챙겨 들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 끝에 마침내 경찰을 따돌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시외버스를 타고 아직도 기약 없이 어디론가 도피를 하고 있는 김영수와 정순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두 사람만이 아니다. 만삭인 정순의 배 위에 완성된 전태일의 전기가 놓여 있다. 영수는 잠든 아내의 배에 귀를 대본다. 탄생을 예고하는 새로운 생명의 힘찬 숨소리가 들린다. 영수의 귀에는 그것이 분신하던 날에 전태일의 가슴을 울리던 심장의 박동소리로 바뀐다. 불꽃에 휩싸이는 육신의 죽음 위로 겹쳐지는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당시 심의 판정에서 고교생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았고 막상 개봉 후에는 숭고와 환희가 하나로 느껴지는 걸작 취급을 받게 됨과 동시에 사실적 허구가 아니라 허구적 진실을 탐지해 낸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 마디로 한국 역사 영화 장르에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면서 어마어마하면서도 엄청난 완성도로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 영화 장르물을 대표하는 대걸작으로 대우받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물인 전태일의 생애와 성장과정을 모티브로 하면서 영웅적 투쟁이나 정치적 선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당시 열악하던 노동현장과 노동계 현실을 성실하고 똑똑한 청년이 겪었던 절망으로 이를 고발하였고, 먼지가 자욱했던 다락방 공장은 소녀 노동자들이 6개월 만에 폐결핵에 걸릴 만큼 탁하고 협소한 환경과 더불어서 이 영화의 감독은 그곳을 사실적인 세트와 폐쇄적인 영상구도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디지털 사운드를 도입하면서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지식인 김영수가 전태일의 일기와 그가 남긴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은 이러한 의식의 흐름과 플래시백으로 재구성된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게 되면서 전태일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진행되었고, 김영수의 이야기는 컬러 화면을 구분하고 카메라워크와 컷을 절제하는 등 당시 국내기술로서는 한계가 있어서 특수효과와 나머지 기술들은 호주에서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 제16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촬영상[2]
1995년 제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조명상
1996년 제1회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영화상, 올해의 배우상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기술상, 여자신인연기상
1996년 제34회 대종상 기획상
1996년 제4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후보

이 작품의 관찰자 역을 하는 김영수(문성근 분)는 이 작품에서의 전태일의 일화에 대해서 소개한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저술한 조영래 변호사를 모델로 했다.
은근히 노출신이 많이 나온다. 물론 2020년대 기준으로는 아주 심하게 야한 장면은 아니고 전태일을 포함한 바보회 회원들이 한창 활동을 시작하면서 희망에 젖어있을 때 단합회 형식으로 바다에 놀라갔다가 옷을 훌러덩 벗고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분신 장면을 촬영할 때 당시 한국에는 그래픽 기술이 안 좋아서 몸에 직접 불을 붙여서 촬영했다고 한다. [3] 워터젤이라는 걸 몸에 바르고 불을 붙이는 기법으로 훗날 한국 화재 재난 영화에 적잖이 사용하게 된다.
실제 화재 사고에서는 사람의 몸에 땀이 생각보다 많이 나지 않지만, 화재 영화에서 주인공이 땀을 많이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온몸에 바른 워터젤 때문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안전한 게 아닌 기법이라서, 워터젤을 온몸에 바르자마자 바로 찍지 않고 몇 분만 지체되어 촬영하면 워터젤이 금세 말라 큰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다. 그나마도 소방관 등 화재현장 속에서의 사람을 찍는 건 사람과 불의 거리가 있지만, 전태일 영화처럼 5번 연속으로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경우는 매우 위험하다.
마지막 신으로 온몸이 불타면서 거리를 질주하는 전태일의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나온다. 목숨을 건 촬영이었으며, 담당배우인 홍경인이 전태일 열사의 강인한 정신력과 놀라운 의지를 최대한 보여준 명장면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 일기장을 열어보니 내가 당시 극장에서 보았던 100편의 영화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기간은 대학생 1학년 때인 1995년부터 군 전역 이후인 2003년까지였으며, 아마도 1995년에 별책부록으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100번째 영화를 본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이었음에 혼자서 감회를 느끼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재미로 그 첫 번째 영화부터 다시 보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영화는 바로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1995년 11월 15일에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대학시절 친구와 보았는데, 영화가 일반 극장이 아닌 대학교 대강당에서 상영된 것은 아마도 영화 속에서 서울대학교 장면이 있는 것도 있으며, 또한 엔딩 크레디트에서 보듯 이 영화가 일반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제작되었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보듯이, 1995년 당시는 문민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자락을 붙잡고 있던 시절이었으며, 특히 민주노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노동계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시기였다(당시 우리 학과에서도 일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수요집회 참여 및 후원도 활발히 했던 기억이 난다). 

따라서 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자본'에 맞선 '노동'의 투쟁기이며, 그 선봉에 서서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하나의 갈래였다. 

그러니까 두 명의 감독이 있다. 한 사람이 노동열사 전태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또 한 사람은 1980년 5월 광주를 다루고 있었다. 한 명의 청년 주인공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그 스스로를 분신하려고 결심하는 동안 또 한 명의 소녀 주인공은 미쳐서 세상을 떠돈다. 그 두 편의 영화는 플래시 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문성근이 있다. 

그러니까 박광수와 장선우는 그렇게 다르다. 그 둘을 가르는 것은 객관적 상항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처한 불완전성 속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세계, 또는 그 목적론적인 반역 사이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 둘을 동시에 감싸는 것은 현실 속의 통일성의 모순과 필요성이다. 시간은 자기를 놓쳤고, 유령처럼 떠돌다가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라. 이제 우리는 말하여야 한다. 죽은 자들은 웅성거리고, 시간은 멋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까 1990년대는 이미 잃어버린 우리들의 근대의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강박관념은 공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간이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지만 박광수와 장선우의 영화들은 프루스트적이다. 그건 그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모더니티의 자장 안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태일과 광주는 우리에게 더 없는 부채이다. 부채는 청산해야 하지만, 갚아야 할 자들은 계속 채무를 연기하고, 이자가 늘어나는 동안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들, 그러니까 그 스스로 햄릿이라고 생각하는 아들이다. 말하자면 아들의 피해의식(또는 복수의 정념)에서 나온 연대, 그 속에서 죽음의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스스로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하여 연출한 광대들의 무대는 여기서 영화라는 제의식, 또는 기일을 맞이한 추모의 염으로 풀어나가야만 했다. 

여전히 집회는 금지되었고, 진실은 알레고리로서만 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그 자체가 아니라 중개된 것이다. 이제 중개의 수사학은 1990년대 한국영화에서 미학이자 정치학이며 동시에 양심의 윤리학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계관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에서 노동자 전태일은 “우리들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한마디를 외치고 분신자살한다. 이 외로운 죽음은 기나긴 노동운동의 불꽃(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Single Spark)>이다)이 되었다. 그날 이후 이 땅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계급의식을 쟁취하는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계급은 둘로 나뉘었다. 

이제 세상은 가진 자와 빼앗긴 자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의 정권이양이 가져온 위기의 폭력적 해결방식에 의해) 또한 1980년 5월 광주로 가는 길이 되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런 의미에서 전기영화가 아니라, 다시 돌아보는 1970년대의 시간에 대한 의식이며 기억에 대한 지속의 믿음이다.
이 영화에는 네 개의 시간이 있다. 그 하나는 전태일의 1960년대를 거쳐 1970년 11월 13일에 끝나는 전기적 시간이며, 또 하나는 1975년 긴급조치 7호와 9호가 선포되어 쫓기면서 전태일에 대한 전기를 쓰는 가공의 인물영수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이야기 앞에는 1995년 민주노총 노동자 대회의 시간이 돌아보고 있다. 

그 마지막 시간은 이 세 개의 시간 사이로 들어가야 하는 우리들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들이 전태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태일이 우리를 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 우리들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일깨워준다(지금 그 거리에서 전태일이어도 되고, 또는 그 누구여도 상관없는 노동자 청년이 우리를 돌아보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러니까 전태일은 매 시간마다, 매 시대마다 우리 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불멸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시 배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전태일이 석유를 뒤집어쓰고 라이터를 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순식간에 불붙을 것이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근로기준법 따위는 태워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미래의 플래시 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 자신이 죽어 세상의 재가 된 다음 바뀌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시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을 바꾸어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전태일이 꿈꾸던 바로 그 세상인가? 그 일 분의 상상. 몸에 불이 붙기 전, 그 일 분 동안 미래의 대학생 친구 영수, 더 먼 미래의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의 동지들, 노동 형제들, 자기 자신이 걸었던 청계천 그 골목을 걸어갈 미싱 시다 동생 그 누군가를 떠올린 것일 수도 있다. 

그건 중단된 역사의 순간 속에서 단 한 번에 이루어내는 세상에 대한 총체적 전망이다. 그러나 영화의 시간은 다시 그것을 분산시킨다. 영화를 바꾸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전태일은 아직 라이터를 들고 서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꿈 속에서 부채를 갚기 위해 머물러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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